전체 글123 극한의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의지 (불꽃, 전쟁, 인간) 살아남기만 하면 충분한 걸까요. 저는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던 날, 그 전제가 흔들렸습니다. 선우휘의 『불꽃』은 바로 그 질문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 집어넣고, 끝까지 놓지 않는 작품입니다.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인간에게 묻는 것전쟁은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실존적 시험대(existential test)입니다. 여기서 실존적 시험대란, 철학에서 말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 개념을 빌려온 표현으로,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을 외부 환경의 압력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사람의 진짜 모습이 벼랑 끝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불꽃』이 흥미로운 이유는 전쟁을 단순한 배경으로.. 2026. 4. 23. 욕망과 성공의 민낯을 드러내는 사회의 초상-벨 아미 (능력, 욕망, 성공) 직장에서 자기보다 눈에 띄게 빠르게 올라가는 사람을 본 적 있으신지요. 저도 그런 동료를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그냥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기 드 모파상의 『벨 아미』는 바로 그 '설명되지 않는 것'을 150여 년 전에 이미 해부해 놓은 소설입니다.능력보다 먼저 작동하는 것들저와 함께 일했던 그 동료는 실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실력 이상으로 잘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사람과의 관계를 읽는 능력이었습니다. 상사에게는 적절한 타이밍에 의견을 꺼내고,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한 발 먼저 빠져나오고, 정작 중요한 자리에서는 기가 막히게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반면 저는 맡은 일만 잘하면 자연스럽게 평가.. 2026. 4. 22.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성과 본능, 자아, 균형) 안정적인 길을 선택했는데도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한 경험, 한 번쯤 있으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바로 그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정확하게 짚어줍니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두 인물로 나눠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독자 앞에 놓습니다.이성과 본능, 그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저는 한때 현실적인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계획대로 움직이고, 감정은 최대한 배제한 채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딘가 공허했습니다. 반대로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택했던 시기에는 자유롭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지만,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이 두 가지 .. 2026. 4. 21. 사랑과 예술,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는 삶 (갈매기, 사랑, 예술)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갈매기』가 그냥 "러시아 고전"이라는 인식 때문에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작품이 특별히 어렵거나 고풍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제 과거의 어떤 기억과 너무 닮아 있어서,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닿지 않는 사랑, 그리고 어긋나는 감정 구조『갈매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물들이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그 감정이 단 한 번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트레플레프는 니나를 사랑하고, 니나는 트리고린에게 끌리고, 트리고린은 또 다른 방향을 바라봅니다. 체호프는 이 구조를 비극적 서사의 골격으로 삼는데, 문학 이론에서는 이를 삼각 욕망(triangular desire)이라고 부릅니다. 삼각 욕망이란 주체가 대상을 직접 원.. 2026. 4. 20.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발견하는 세계 (산책자, 걷기, 일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정리된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그 경험을 책상 앞이 아닌, 집 근처 골목길을 걷다가 처음 제대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읽고 나서야, 그 감각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걷기가 사유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제 골목길 이야기한동안 저는 하루를 쪼개 쓰듯 살았습니다. 출근과 퇴근, 그 사이의 짧은 시간들을 죄다 '효율적으로' 채우려 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뭔가 계속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별다른 목적 없이 집 근처를 걸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가게 앞 작은 화분, 같은.. 2026. 4. 18. 붕괴하는 집, 무너지는 정신 (어셔가의 몰락, 공간, 공포, 붕괴) 공포는 바깥에서 오는 걸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안에 있던 걸까요. 저는 스트레스가 심했던 시기에 같은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은 바로 그 질문을 19세기에 이미 정확하게 짚어낸 작품입니다. 공간과 정신이 어떻게 서로를 잠식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디인지를 섬뜩하게 보여줍니다.공간이 감정을 반영한다는 것일반적으로 공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그건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한동안 번아웃 상태에 있던 시절, 저는 오래 살던 집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벽지도 그대로고, 가구도 그대로였는데 왠지 방 안의 공기 자체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밤이 되면 아무 이유 없이 .. 2026. 4. 17. 이전 1 2 3 4 5 6 7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