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단 몇 줄로 처리된 열두 명 하녀의 처형 장면을 반복적으로 환기시킵니다. 영웅의 귀환과 질서 회복이라는 대서사 뒤편에서, 누군가는 이름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회사에서 목격했던 장면이 겹쳐 보였습니다. 공식 보고서에는 팀장의 리더십만 기록되었지만, 실제 성과는 밤새 데이터를 정리한 실무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침묵 –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의 무게
전통적으로 페넬로페는 20년을 기다린 현숙한 아내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애트우드는 그녀를 계산적이고 불안한 인물로 재구성합니다. 이건 단순한 캐릭터 수정이 아니라, 여성에게 강요된 미덕의 구조를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특히 열두 명의 하녀가 처형되는 장면은 원전에서는 단 몇 줄로 지나갑니다.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제거한 후, 그들과 관계했다는 이유로 하녀들도 함께 처형됩니다. 영웅의 정의 구현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는 희생되었고 그들의 변명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페넬로피아드에서 하녀들은 코러스로 등장해 반복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고 항의합니다. 저는 이 장치가 매우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현실에서도 공식 기록은 힘 있는 쪽의 관점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의실에서 결정된 방향은 문서화되지만, 그 과정에서 묵살된 의견은 기록조차 되지 않습니다.
서사 – 이야기를 쓰는 자가 만드는 진실
누가 이야기를 기록하느냐에 따라 도덕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지혜롭고 용감한 영웅이지만, 페넬로페의 시점에서 보면 그는 과장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입니다. 애트우드는 원전의 권위를 전복하면서, 서사 자체가 권력 구조임을 드러냅니다. 역사는 객관적인 기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택과 삭제의 결과입니다. 어떤 사건을 어떤 각도에서 서술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실도 다르게 해석됩니다. 저는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를 작성할 때 이런 순간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어떤 데이터를 강조하고 어떤 과정을 생략하느냐에 따라, 같은 프로젝트도 성공 사례가 되기도 하고 평범한 결과물이 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전은 불변의 가치를 담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특정 시대와 집단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페넬로피아드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주어진 서사를 그대로 믿는가, 아니면 그 뒤편을 질문하는가.
정의 – 질서 회복이라는 이름의 폭력
하녀들의 코러스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불편함을 남깁니다. 그들은 노래하고, 조롱하고, 자신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설명합니다.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공식 서사에 균열을 냅니다. 저는 이 장치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정의는 단순히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정의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제거하고 왕궁의 질서를 되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녀들은 변명조차 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구혼자들과 관계한 것이 자발적이었는지, 강요받은 것인지조차 묻지 않았습니다. 애트우드는 영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 영웅담의 그림자를 보여줍니다. 누군가의 업적 뒤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습니다. 그 희생을 보지 않는 한, 우리는 같은 구조를 반복할 가능성이 큽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보충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이 단순히 남성 영웅 서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페넬로페조차 완전히 무죄한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권력 구조 안에서 선택하고 침묵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남녀 대립이 아니라, 서사를 소유한 자와 배제된 자의 문제를 더 넓게 보여준다고 봅니다. 페넬로피아드는 고전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현재를 비춥니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침묵 위에 세워진 이야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를 의심하고, 영웅의 서사 뒤를 보고, 정의라는 단어를 쉽게 소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애트우드가 말하듯,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일은 과거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오래 남는 질문을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