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진다고 믿어왔는데, 왜 지출이 늘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공허해졌을까요. 저도 한동안 그 질문을 외면했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 사상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쾌락이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덜어내는 일이라는 것.
쾌락의 정체, 그리고 제가 놓치고 있던 것
직접 겪어보니 소비를 통한 위안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식었습니다. 일이 버거운 날이면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기분이 나아졌는데, 다음 날 카드 내역을 확인하고 나면 어김없이 찜찜함이 밀려왔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찜찜함을 또 소비로 달래려 했다는 겁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의 핵심은 아타락시아(ataraxia)입니다. 아타락시아란 마음의 동요가 사라진 상태, 즉 불안과 두려움이 제거된 내적 평정 상태를 의미합니다. 감각적 자극을 극대화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그는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봤습니다. 육체적 고통인 포노스(ponos)와 정신적 불안인 타라케(tarache)입니다. 포노스란 신체가 느끼는 물리적 고통이고, 테라카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욕망의 좌절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동요를 가리킵니다. 에피쿠로스는 이 두 가지가 제거된 상태가 곧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충만한 삶이라고 봤습니다.
그때 느낀 건, 제가 쾌락을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찾고 있었다는 겁니다. 더 자극적인 것, 더 새로운 것을 계속 투입하면서 오히려 그 기저에 깔린 불안은 손대지 않고 있었던 셈이죠.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층위로 구분했는데, 이 분류 자체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 음식, 수면, 안전처럼 생존에 직결되는 것
-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더 맛있는 음식, 더 편안한 환경처럼 자연스럽지만 없어도 되는 것
- 헛된 욕망(kenodoxia): 명예, 권력, 타인의 인정처럼 끝이 없고 충족되어도 만족이 지속되지 않는 것
여기서 케노독시아(kenodoxia)란 실체 없는 믿음에서 비롯된 욕망, 즉 사회적 시선이나 비교 심리가 만들어낸 허상의 필요를 뜻합니다. 에피쿠로스가 가장 경계하라고 말한 욕망이 바로 이것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욕망에도 질이 있다는 발상이 2,300년 전 철학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실제로 긍정심리학 분야의 연구에서도 유사한 결론이 나온 바 있습니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물질적 소비와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가 약해진다는 분석이 대표적입니다(출처: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에피쿠로스의 직관이 현대 심리학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절제가 만들어낸 변화, 제 경험과 에피쿠로스의 거리
어느 시점부터 저는 의도적으로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외식보다 집밥, 자극적인 콘텐츠보다 짧은 산책, 카카오톡 단체방보다 친한 사람 한두 명과의 대화. 처음 한 달은 솔직히 심심했습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두 달쯤 지나자 달라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자극이 줄어드니까 오히려 작은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역치(threshold)가 낮아지더군요. 여기서 역치란 어떤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강도를 말합니다. 자극이 강할수록 역치는 올라가고,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해지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그 사이클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아침 커피 한 잔이 충분히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에피쿠로스가 강조한 또 다른 축은 필리아(philia), 즉 우정과 친밀한 인간관계입니다. 필리아란 단순한 친분이 아니라, 신뢰와 상호 이해를 기반으로 한 깊은 유대를 가리킵니다. 그는 물질적 풍요보다 안정된 관계망이 정신적 평온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봤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이론으로 들었을 때는 당연한 말처럼 들렸는데, 막상 소비 대신 사람에 시간을 쓰기 시작하면서 체감하게 된 차이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물론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완전한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절제와 평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새로운 도전이나 성장 욕구 자체가 억눌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때로는 불확실함에 뛰어드는 경험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비필수적 욕망을 차단하기보다는, 그 욕망이 자신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는지를 기준으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뇌과학 연구에서도 도파민(dopamine) 체계가 과도하게 자극받을 경우 오히려 기저 행복감이 낮아지는 현상이 보고된 바 있습니다. 도파민이란 보상을 기대하거나 실제로 보상을 받을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 동기와 쾌감에 깊이 관여합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이 연구가 말하는 바는 에피쿠로스의 언어와 다를 뿐, 방향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결국 에피쿠로스가 말한 것은 금욕이 아닙니다.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을 만큼의 자기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 지점에서 비로소 진짜 쾌락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완전히 도달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소비로 감정을 덮으려 했던 시절보다는 분명히 마음이 가볍습니다. 지금 무언가를 계속 채우려 한다면, 한 번쯤 덜어내는 방향을 실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잃을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