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이 책을 단순한 여행 판타지 소설 정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도시를 묘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름다운 풍경이나 이국적인 문화를 나열하는 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도시를 묘사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재구성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책이었습니다.
도시는 상상 속에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도시라고 하면 건물과 도로, 인구로 측정되는 물리적 공간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절반밖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같은 동네에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 골목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었습니다. 건물 하나 바뀐 게 없었는데, 그날따라 그 거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차이는 외부가 아니라 저 자신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기분이 무거운 날에는 같은 거리도 좁고 어둡게 느껴졌고, 여유 있는 날에는 넓고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도시들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작품 속 도시들은 토포필리아(Topophilia)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토포필리아란 인간이 특정 장소와 감정적으로 맺는 유대 관계를 뜻하는 개념으로, 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정립한 용어입니다. 칼비노의 도시들은 정확히 이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외형이 아니라 그 공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 기억, 욕망이 도시의 실체를 구성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제가 살던 동네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결국 제가 그 공간을 어떻게 느꼈는지가, 그 장소에 대한 저의 진짜 지도였던 셈입니다.
반복되는 구조가 인간의 기억을 닮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독특한 이유 중 하나는 서사 구조 자체에 있습니다. 이 책은 선형 서사(Linear Narrative), 즉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이어지는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선형 서사란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서술 방식을 말합니다. 칼비노는 이 구조를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짧은 도시 이야기들을 반복과 변주의 방식으로 배치합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소설은 기승전결이 분명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믿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반복되는 구조가 오히려 인간의 기억 방식과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깔끔한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감정이 다른 상황에서 되풀이되고, 과거의 경험이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해석됩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재구성적 기억(Reconstructive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재구성적 기억이란 과거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와 맥락에 따라 기억 자체가 변형되어 떠오르는 현상을 말합니다. 칼비노의 반복 구조는 바로 이 원리를 소설 형식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입니다(출처: 영국심리학회).『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독자에게 명확한 결론을 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듯이, 이 책도 열린 채로 독자의 해석을 기다립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공간을 구성한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도시의 겉모습보다 그 안에 축적된 것들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었습니다. 건물의 높이나 거리의 폭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오간 감정과 관계, 잊힌 기억들이 도시의 진짜 층위를 형성한다는 시각입니다. 이는 현상학(Phenomenology)적 공간 이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현상학이란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대신,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입니다.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 같은 철학자들이 발전시킨 이 개념에 따르면, 공간은 측정 가능한 좌표가 아니라 인간의 체험이 쌓인 결과물입니다. 저는 이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보이는 현실의 의미가 흐려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책을 둘러싼 해석 중에는 도시를 순전히 내면의 투영으로만 읽으려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것이 다소 좁은 접근이라고 봅니다. 칼비노의 도시들은 인간 내면을 반영하는 동시에, 언어와 서술 방식 자체를 실험하는 메타픽션(Metafiction)의 성격도 강합니다. 메타픽션이란 소설이 소설임을 스스로 의식하고, 글쓰기와 표현의 방식 자체를 주제로 삼는 기법을 말합니다. 즉, 이 책은 '무엇을 표현하는가'만큼이나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동시에 묻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이해할 때 확인해 볼 만한 핵심 층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 기억과 욕망의 산물로서의 도시: 각 도시는 인간 감정의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 서술 방식 자체에 대한 실험: 어떻게 이야기가 구성되는지를 의식적으로 탐구한다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상호작용: 둘이 길항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내가 해석한 세계가 곧 내 세계다
이 책이 결국 던지는 질문은 꽤 불편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세계가, 사실은 우리의 기억과 감정이 재구성한 결과물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앞서 말한 골목길 경험 이후로, 어떤 공간이나 상황을 판단할 때 한 번 더 멈추게 됐습니다. 지금 제가 느끼는 이 낯섦이나 불편함이 정말 외부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날의 제 상태가 만들어낸 인식인지 구분하려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겪고 나서야 체감할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인지과학 분야의 연구에서도 인간의 지각은 외부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뇌가 능동적으로 예측하고 구성하는 과정임이 밝혀져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칼비노는 이 사실을 60년 가까이 전에 소설 형식으로 보여준 셈입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읽고 난 뒤에 뭔가 확실한 결론이 생기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읽을수록 질문이 늘어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불친절하게 느껴졌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한 번에 몰아 읽기보다 한 도시씩 천천히 읽고 각 도시가 어떤 감정이나 기억과 연결되는지 생각해 보는 방식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