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겉보기엔 환상동화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는 논리와 규칙을 정면으로 흔드는 작품입니다. 토끼 굴 아래 펼쳐진 세계에서 앨리스는 계속 크기가 변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며, 모든 규칙이 순간마다 바뀌는 혼란을 겪습니다. 저 역시 대학교 1학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조별 발표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답을 말했다가 "그건 왜 당연하다고 생각하죠?"라는 교수님의 반문을 듣는 순간, 제가 믿던 상식이 사실은 사회적 합의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리해체 – 상식이란 이름의 약속
일반적으로 논리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논리란 특정 집단이 합의한 규칙일 뿐입니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엉뚱하게 돌아오고, 재판은 결론이 먼저 정해져 있으며, 시간은 멈춰 있고, 규칙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루이스 캐럴은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사회 규범과 교육 체계를 비꼬는데, 특히 형식논리학(Formal Logic)의 맹점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형식논리학이란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반드시 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 체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인물들은 형식적으로는 올바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쏟아냅니다. 예를 들어 3월 토끼의 다과회 장면에서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한다"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는 형식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실제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캐럴은 이런 식으로 논리의 형식만 갖추면 내용이 없어도 그럴듯해 보이는 담론의 허점을 공격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 겪었던 그 순간도 비슷했습니다. 교과서에 쓰여 있고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까 맞는 줄 알았지만, 막상 설명하려니 근거가 빈약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형식적 권위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같은 이유로 생각을 멈춥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보여주듯, 권위 있어 보이는 말도 실제로는 내용 없는 껍데기일 수 있습니다. 캐럴이 수학자였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출처: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수학과 기록). 그는 논리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것을 뒤틀어 풍자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그저 이상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다시 읽으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형식적 규칙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있는지 보였습니다. 회사에서 "원래 이렇게 해왔어요"라는 말, 뉴스에서 "전문가들은 이렇게 봅니다"라는 말,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이상한 나라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체성혼란 – 나는 계속 변한다
일반적으로 성장은 안정적인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성장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앨리스는 작품 내내 크기가 변합니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립니다. 이는 단순한 판타지 설정이 아니라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은유입니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인식을 의미하며, 심리학에서는 자아정체감(Self-identity)이라고도 부릅니다. 앨리스가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은 "나는 도대체 누구지?"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메이블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애벌레에게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유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면 평생 붙들어야 할 질문입니다. 저 역시 대학교 때 한 번,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한 번, 이직을 준비할 때 또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아동을 '작은 어른'으로 보고 엄격한 규율과 예절을 강요했습니다(출처: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박물관). 아이들은 정해진 틀에 맞춰 자라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물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캐럴은 앨리스의 크기 변화를 통해 이 억압적 성장 과정을 비틉니다. 크기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성도 고정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설정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알겠더군요. 어제의 제가 오늘의 저와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저는 계속 변합니다. 회사에서는 "실무자"로, 집에서는 "자식"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요? 앨리스처럼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겪는 혼란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큼 직접적으로 크기 변화를 통해 정체성 혼란을 시각화한 경우는 드뭅니다. 캐럴은 심리학적 통찰을 판타지로 풀어냈고, 그 덕분에 이 작품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성장의 핵심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 타인의 시선과 내가 느끼는 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 혼란은 성장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다
언어권력 – 말은 세계를 만든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언어는 권력 그 자체입니다. 이상한 나라에는 말장난, 역설, 난센스가 가득합니다.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혼란을 만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나옵니다.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말은 규칙을 만들고, 권위를 만들고, 세계를 정의합니다. 캐럴은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의 핵심 문제를 다룹니다. 언어철학이란 언어와 의미, 그리고 현실의 관계를 연구하는 철학 분야를 말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의 의미를 바꿉니다. "내가 사용할 때 단어는 내가 선택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험프티 덤프티가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언어가 합의된 체계가 아니라 권력의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정의하느냐에 따라 '정상'과 '이상'이 바뀝니다. "전문가", "상식", "객관성" 같은 단어들은 중립적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같은 일을 두고도 상사는 "효율적"이라고 부르고, 실무자인 저는 "무리한 일정"이라고 느낍니다. 누구의 언어가 채택되느냐에 따라 업무의 성격이 규정됩니다. 캐럴이 이 작품을 쓴 1865년은 영국이 제국주의를 확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영어가 강제되었고, 원주민의 언어는 억압받았습니다. 언어가 곧 지배 도구였던 시대입니다. 캐럴은 이상한 나라에서 언어의 자의성과 권력성을 폭로함으로써, 언어가 절대적 진리를 담는 그릇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읽을 때마다 불편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언어 역시 누군가의 권력을 재생산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문가가 말하길",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같은 표현을 쓸 때마다, 저는 특정한 관점을 절대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캐럴은 동화 형식을 빌려 이런 불편한 진실을 드러냅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150년 넘게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한 재미 때문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논리, 규칙, 언어가 사실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줍니다. 상식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성장은 혼란을 동반합니다. 언어는 세계를 만듭니다. 이 세 가지 통찰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 겪었던 그 질문의 순간은 제게 작은 '이상한 나라'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어떤 주장이나 규칙을 만났을 때 "왜?"라고 되묻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어린 시절에는 모험 이야기로 읽었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풍자이자 경고로 읽힙니다. 웃으며 읽지만, 읽고 나면 생각하게 되는 책입니다.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사고의 가능성을 넓히고 싶다면, 이 작품을 다시 펼쳐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