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몸으로 느낀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면서 그 기억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감정이 아닌 '삶의 조건'이 관계를 결정짓는다는 이야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이미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왜 항상 감정만의 문제가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 폴은 오랜 연인 로제와 함께하면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관계에는 오랜 시간이 쌓아 올린 익숙함과 신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젊고 열정적인 시몽이 등장하면서 그녀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오래 만난 연인과의 관계는 편안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 편안함이 설렘을 대체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오랜만에 심장이 빨리 뛰는 감각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그때 저는 꽤 혼란스러웠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접근-회피 갈등(approach-avoidance conflict)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접근-회피 갈등이란 하나의 대상이 매력과 불안을 동시에 유발할 때 발생하는 내적 긴장 상태를 말합니다. 시몽에게 끌리면서도 그 관계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폴의 심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감정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수없이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사강은 이 상황을 단순한 삼각관계로 그리지 않습니다. '누구를 선택하느냐'보다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젊음과 안정, 우리는 왜 둘 다 원하는가
시몽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젊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 숨 쉬는 듯한 감각, 자신이 여전히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확인입니다. 반면 로제가 주는 것은 지속 가능성과 예측 가능한 미래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한다는 데 있습니다. 관계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항상성(emotional homeostasis)의 문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정서적 항상성이란 인간이 감정적 자극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본능을 의미합니다. 너무 자극이 없으면 지루함을 느끼고, 너무 불안정하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폴이 어느 쪽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지만, 동시에 '이 관계가 얼마나 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항상 따라붙었습니다. 즐거움과 불안이 공존하는 그 상태, 소설을 읽으면서 그 감각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관계에서 친밀감, 열정, 헌신이라는 세 요소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심리학 이론 기반 자료 —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 예일대학교).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Triangular Theory of Love)이란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가 제안한 이론으로, 완전한 사랑(consummate love)은 세 요소가 균형 있게 존재할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폴이 로제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결핍은 바로 이 세 요소 중 '열정'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폴이 두 사람 사이에서 오래 머무는 이유를 비난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역시 같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폴이 경험하는 갈등 구조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로제: 안정감, 익숙함, 예측 가능한 미래 → 열정 부재
- 시몽: 감정적 자극, 설렘, 현재의 강렬함 → 미래 불확실
- 폴: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결국 선택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었다
소설의 결말에서 폴이 내리는 선택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열정보다 익숙함을 고릅니다. 이 결정을 두고 어떤 독자는 아쉬워하고, 어떤 독자는 현실적이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는 후자였습니다. 저 역시 결국 익숙한 관계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선택이 완전히 만족스러웠느냐고 물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감정보다 삶의 방향과 안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그 판단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현실적인 선택이 반드시 더 나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정적인 선택을 하고도 시간이 지나면서 공허함이 남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불안정해 보이는 선택이 더 큰 충족감을 주는 경우도 분명 존재합니다. 사강이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독자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그토록 흔들릴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관계에서의 선택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 역시 "최적의 선택보다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선택이 장기적 만족도를 높인다"라고 말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 '정답'인가가 아니라, 그 선택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삶을 만들어가느냐입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그 질문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던지는 소설입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면서도, 그 선택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혹시 지금 비슷한 갈등 속에 있다면, 이 소설이 답을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는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