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에서 내 말이 공기처럼 스쳐 지나가는 경험,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저는 그 경험이 꽤 길었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다 랄프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을 펼쳤고, 첫 장부터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나의 윤곽선
사회적 가시성(social visibilit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가시성이란, 한 개인이 사회 안에서 얼마나 '있는 존재'로 인식되는가를 뜻합니다. 물리적으로 자리에 있더라도, 타인의 인식 속에서 무게를 갖지 못하면 그 사람은 사실상 투명한 존재가 됩니다. 랄프 엘리슨은 1952년 이 작품을 발표하며, 그 투명함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정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주인공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미 특정한 틀에 갇힙니다. 그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인지는 처음부터 관심 밖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그를 대신 설명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건 꼭 인종 문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회의실에서 저는 분명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제 말은 자주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직급이 높은 사람이 꺼내면 그제야 고개들이 끄덕였습니다. 처음엔 제가 표현을 잘못했나 싶어 더 조심스럽게, 더 정확하게 말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제 말의 내용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를 어떤 틀로 바라보는가에 있었다는 것을. 이런 현상은 사회심리학에서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으로도 설명됩니다. 고정관념 위협이란,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이 그 집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의식하게 될 때 실제 수행 능력까지 저하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주인공이 점점 자기 목소리를 잃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 메커니즘과 닮아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정체성을 잃는 방식은 조용하고 점진적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의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여러 집단과 이념 속을 헤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들어가도 그는 온전히 자신일 수 없습니다. 집단은 항상 그에게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고, 그 역할에 맞추는 순간 또 다른 '나'가 조금씩 지워집니다.
이 과정은 심리학에서 자아 정체성 혼란(identity diffusion)과 연결됩니다. 자아 정체성 혼란이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감각 없이 외부 기대에 따라 정체성이 흔들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정립한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에서도 이 개념은 핵심 위기 중 하나로 다뤄집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나마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흐릿해지더라고요. 의견을 말하기 전에 '이 말이 이 자리에서 어울리나'를 먼저 계산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을 때, 꽤 오랫동안 그냥 넘겼던 문제가 사실은 꽤 깊이 들어와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신호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타인의 반응부터 계산하게 된다
- 특정 집단이나 역할 안에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너무 다르게 느껴진다
- 오랫동안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 누군가 "너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물을 때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 목록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조금은 공감하고 계신 겁니다.
보이지 않음을 발판으로 바꾸는 순간
엘리슨의 소설이 단순한 고발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오히려 역이용하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충분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동시에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가 된다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어차피 나는 안 보인다'는 생각이 체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그 생각이 다르게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먼저 꺼내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틀려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제 의견을 먼저 말했고, 조금씩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정의하는 힘이 생기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와 관련해 자기 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은 중요한 틀을 제공합니다. SDT란, 인간이 외부 압력이 아닌 내면의 동기와 자율성에 의해 행동할 때 심리적으로 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산다는 이론입니다.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이 제안한 이 이론에 따르면, 타인의 기대로부터 분리된 자기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정체성 회복의 출발점이 됩니다(출처: Self-Determination Theory Official Site).
보이지 않음을 발판으로 바꾸기 위해 저는 이렇게 접근했습니다.
- 완벽한 말보다 먼저 꺼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보다 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 작은 자리에서라도 제 해석과 판단을 담은 말을 습관처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쌓이면서, 예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랄프 엘리슨의 소설은 70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지금 이 순간 직장에서, 관계에서, 혹은 어떤 집단 안에서 자신이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끼는 분이라면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경험은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진짜 나를 다시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완벽한 답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먼저 내 목소리를 작게라도 꺼내는 것, 그게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