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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시대 속에서 기록하는 존재 '말테의 수기' (불안, 자아, 삶, 균형)

by 토끼러버 2026. 5. 6.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도서 관련 사진

불안은 없애야 할 감정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저도 한때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고 나서, 그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불안이 오히려 자신을 가장 선명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도시 속 고독이 만드는 실존적 불안

『말테의 수기』의 주인공 말테는 파리라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살아갑니다. 수백만 명이 오가는 공간에 몸을 두고 있지만, 그가 경험하는 것은 연결이 아니라 철저한 단절입니다. 이 감각을 저는 꽤 오랫동안 실제로 느껴왔습니다. 한동안 일정을 빈틈없이 채우고, 하루에도 수십 건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지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겉에서 보면 관계도 많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밤이 되어 혼자가 되는 순간마다 이상한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그 감각이 정확히 말테가 파리에서 느끼는 것과 겹쳤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자주 연락하고 관계를 많이 유지하면 외로움이 줄어든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건 꼭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관계의 밀도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가 문제였습니다. 『말테의 수기』는 이 지점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고립감(social isolation)과 구분하여 실존적 고독(existential loneliness)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실존적 고독이란 외부 환경과 무관하게 개인이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느끼는 근원적인 단절감을 의미합니다. 말테가 파리에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 실존적 고독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현대인의 고독 문제는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국내 1인 가구 비율은 2023년 기준 34.5%에 달하며, 주관적 고독감을 호소하는 비율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입니다(출처: 통계청). 도시화가 심화될수록 물리적 밀집과 정서적 고립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에서, 100년 전 릴케가 그린 말테의 파리는 현재의 서울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단편적 기억이 쌓여 만들어지는 자아

『말테의 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이야기 흐름을 따르지 않습니다. 과거의 기억, 현재의 관찰, 느닷없이 떠오르는 사유가 뒤섞이며 텍스트를 구성합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구조가 낯설고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펼쳤을 때,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재현한 방식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자아가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경험과 기억의 누적으로 계속 재구성된다는 관점을 내러티브 자아(narrative self)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내러티브 자아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형태로 재구성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는 개념으로,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이론에서 비롯된 틀입니다. 말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길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들을 관찰하고,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되묻습니다. 그 과정은 명확한 답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물음을 낳습니다. 저도 일부러 시간을 비워두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을 때, 처음 마주한 것은 고요함이 아니라 뒤섞인 기억과 감정의 혼란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명확하게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여다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자아 이해가 항상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말테의 수기』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불안을 마주하는 방식이 삶을 바꾼다

『말테의 수기』에서 불안은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닙니다. 말테는 불안을 피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이 태도가 결국 삶과 죽음, 유한성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어집니다. 불안을 존재 인식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은 실존주의 철학(existentialism)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이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으로,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이 이 흐름을 대표합니다. 『말테의 수기』는 이 전통 위에 서 있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불안은 제거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한동안 불안을 느낄 때마다 외부 활동으로 그것을 채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불안을 해소하기보다 잠시 미뤄두는 데 그쳤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짚고 싶습니다. 불안을 사유의 원천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공감하지만, 불안을 마냥 몰입해서 받아들이는 것만이 옳다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에서 불안이 통제 범위를 넘어서면 오히려 사고를 마비시킵니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불안장애(anxiety disorder)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한 정신건강 문제 중 하나로, 전 세계 인구의 약 4%가 불안장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여기서 불안장애란 일상적인 불안 수준을 넘어 생활 기능 자체를 저해하는 임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말테의 수기』가 제시하는 태도는 불안에 완전히 몸을 맡기라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인식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능력을 키우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불안에서 균형을 찾는 세 가지 실마리

『말테의 수기』를 통해 제가 실제로 시도해 보고 효과를 확인한 접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안이 올라올 때 즉시 억누르거나 다른 활동으로 전환하지 말고, 잠시 그 감각을 그대로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 불안의 내용이 무엇인지 언어화(verbalization)한다. 언어화란 모호한 감정 상태를 구체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과정으로, 이를 통해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고 인지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 불안이 지속되거나 일상 기능을 방해할 경우, 이것을 개인의 성찰 과제로만 처리하려 하지 말고 전문적인 지원을 받는 것을 고려한다.

이 세 가지는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불안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하면서도 스스로를 지키는 균형을 잡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끌려다니는 빈도가 확실히 줄었습니다.

불안을 무조건 극복의 대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이해의 대상으로 볼 것인지. 『말테의 수기』는 그 질문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게 던집니다. 어떤 시각이 자신에게 맞는지는 결국 각자가 자신의 불안과 직접 마주해 보면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이 그 과정에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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