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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로 드러나는 존재의 방식 '필경사 바틀비' (선택, 고립, 침묵)

by 토끼러버 2026. 5. 2.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도서 관련 사진

솔직히 말하면, 저는 한동안 제가 왜 특정 일들을 계속 미루는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피곤하다,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냥 하기 싫었던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 모호한 상태를 겪고 나서야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다르게 읽혔습니다. 거부가 단순한 게으름이나 반항이 아니라, 존재 방식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조용하고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하지 않겠습니다"는 정말 선택일까요

바틀비의 가장 유명한 문장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입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었을 때 저는 솔직히 이게 왜 그렇게 대단한 문장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거절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반복해서 읽다 보니 이 표현의 구조 자체가 특이합니다. 그는 "싫습니다"도, "못 하겠습니다"도 아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수동적 거부(passive refusal)란 명시적인 반항 없이 행동 자체를 멈추는 방식의 저항을 말합니다. 명령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주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학 비평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소외(alienation)의 형식으로 분석합니다. 소외란 개인이 사회 구조나 노동 관계 속에서 자신과 타인, 그리고 행위 자체로부터 단절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틀비의 거부는 분노가 아니라 단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무게를 가집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제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일을 미루던 당시, 저는 적어도 "하기 싫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바틀비는 그나마 명확하게 "택하지 않겠다"라고 했지만, 저는 그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상황을 방치했습니다. 거부보다 더 흐릿한 상태였던 셈입니다.

고립은 어떻게 깊어지는가

바틀비는 처음에는 단순히 특정 업무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거부하고, 결국에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이 묘하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점이 저는 가장 무서웠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종종 자기 부재(self-absence)와 연결 짓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하는 존재라는 전제 위에서, 그 의미를 포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탐구하는 사조입니다. 바틀비는 어느 순간부터 의미를 만드는 것도, 찾는 것도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립이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거부들이 쌓이면서 온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일을 미루다 보니 대화가 줄었고, 대화가 줄다 보니 관계가 흐릿해졌습니다. 바틀비의 고립을 단순히 소설 속 극단적인 사례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회적 고립과 정신건강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된 바 있습니다. 고립 상태가 길어질수록 재연결(reconnection)의 가능성 자체가 낮아진다는 점은 심리학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결과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바틀비가 보여주는 고립의 궤적은 그런 의미에서 문학적 과장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묘사에 가깝습니다.

바틀비의 저항이 담고 있는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처음에는 특정 업무만 거부하며 표면적으로는 기능을 유지함
  • 점차 이동, 식사 등 생존과 관련된 행위까지 거부 범위가 확장됨
  •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물리적·심리적 고립이 동시에 심화됨
  • 결국 외부의 어떤 개입도 그의 상태를 되돌리지 못함

침묵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바틀비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읽다 보면 그 침묵이 어느 텍스트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꽤 오래 생각했습니다. 문학 이론에서는 이런 서술 방식을 공백의 수사학(rhetoric of silence)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공백의 수사학이란 설명되지 않는 여백 자체를 의미 생산의 도구로 사용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바틀비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해석하게 만들고, 그 해석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 인물의 존재감은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어떤 시각에서는 바틀비의 침묵을 저항의 언어로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침묵이 강한 메시지가 되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바틀비의 침묵은 결국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았고, 그것은 저항이라기보다 단절에 가까워 보입니다. 허먼 멜빌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바틀비의 행동이 의지적 저항인지 심리적 붕괴인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됩니다. 미국문학학회(MLA)는 『필경사 바틀비』를 19세기 미국 소외 문학의 대표적 텍스트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 작품이 제기하는 노동 소외와 개인 자유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평가합니다(출처: Modern Language Association).

거부가 자유일 수 있는가, 아니면 소멸인가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바틀비의 거부를 멋진 저항으로만 읽고 싶어지는 충동이 있는데, 그 충동을 좀 경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틀비의 선택은 분명 기존 질서에 균열을 만드는 힘을 가집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왜 그것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동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자율성(autonomy)의 한 형태처럼 보입니다. 자율성이란 외부 압력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율적 거부와 무력감으로 인한 정지는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을 미루던 시기를 돌아보면, 그것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그 상태를 바틀비식 저항이라고 포장하기엔 솔직히 그 안에 의지 같은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필경사 바틀비』는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저항이 자기 소멸과 맞닿아 있을 때 어떤 결말을 맞는지도 함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거부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 거부의 이유를 스스로도 모르는 상태라는 것, 제가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 얻은 결론입니다.『필경사 바틀비』는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지금 내가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선택인지, 아니면 그냥 멈춰버린 것인지. 그 차이를 직시하는 것이, 바틀비처럼 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지도 모릅니다. 거부하고 싶다면 적어도 무엇을 왜 거부하는지는 자신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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